
1
하와이로 신혼여행을 다녀오면서 하와이는 여유가 있다면 언젠가 정착해보고 싶은 곳이 되었다.
책을 읽기 전에, 실존하는 파라다이스라고 불리는 아름다웠던 하와이의 모습을 다시 떠올리고 싶었던 게 가장 컸다.
최근에 엄마와의 관계나 옛 하와이의 추억 등을 떠올리며 "알로하, 나의 엄마들"이라는 제목이 마냥 끌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표지 색감이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하와이의 무지개가 이 책을 사고 싶게 만들었다.
2
"원래 골골하던 머스마라 카드라. 내가 죽인 것도 아인데 와 내가 집에 갇혀가 죄인 노릇을 해야 하는지 모르겄다. 시집에서 안 쫓가냈으면 우짤 뻔했노. 그 집에 평생 살았으면 숨 막혀 죽었을 기라."
홍주는 버들이 그동안 보아 온 어떤 과부와도 달랐다. 버들은 속으로만 하던 생각을 거침없이 내뱉자 시원했다. 맞다. 어무이가 과부가 된 기도, 우리 형제들이 아부지 없는 자식이 된 기도 우리 잘못 아이다.(p.19)
앞으로도 과부의 자식으로 삯바느질하며 살다 비슷한 처지의 남자에게 시집가 어머니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의 삶엔 스스로를 위한 시간이 한순간도 없었다. 어머니뿐 아니라 딸인 버들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언젠가 시집가 버리면 그만일 딸들은 부모와 남자 형제들을 위해 희생하는 게 당연한 세상이었다. 하지만 포와에선 결혼한 여자들도 공부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포와는 낙원이었다. 버들은 다시없을 기회다 싶으면서도 제 욕심을 위해 식구를 떠나려는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찔렸다.(p.21)
그리고 무당의 딸인 '송화'가 합류하며 세 명의 사진신부가 조선을 떠나 포와(하와이)를 향한다.
주인공인 버들, 홍주 그리고 송화는 각자 다른 사정으로 당시 조선의 사회적인 상황에서 상처를 받았고, 마냥 천국일 것만 같은 하와이로 향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조금 달랐다.
3
항구는 배에서 내린 사람들, 환영 나온 사람들, 선원들, 장사꾼들로 가득했다. 버들은 피부색과 생김새가 각기 다른 사람들이 쏟아 내는 낯선 말소리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꽃목걸이를 바구니에 담거나 팔에 걸고 다니며 파는 사람들이 많았다. 먹을 것도 아닌 꽃목걸이를 누가 살까 싶었는데 여기저기 마중 나온 사람들이 꽃목걸이를 사서 배에서 내린 사람들에게 걸어 주었다. 이곳의 환영 방식인 모양이었다. 꽃목걸이 장수나 꽃목걸이를 건 사람이 지나가면 달콤한 향기가 났다. 버들은 나중에 그 예쁜 꽃목걸이가 '레이'임을 알았다.(p.70)
4
실제 사진과는 20~30년은 더 흐른 몸과 얼굴을 한 사내들로 깜짝 놀라지만, 이내 하와이에서의 이민자로서의 거친 삶에 빠르게 적응해간다.
세 명은 비록 처음부터 함께 있지는 못했지만, 교회와 같은 한인 커뮤니티를 통해 소식도 간간히 전해듣고, 찾아가 서로의 안부를 살피기도 한다.
이민자의 삶이란 안정되지 못하고 돈에 따라 정처없이 헤매기에 마을을 옮기고 사는 섬이 바뀌기도 하는데 뿌리내리지 못하는 잡초같으며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준다.
문득문득 우리나라에도 정착하고 있는 이민자들이 스쳐지나가며 그들의 삶에 대해서도 잠시 떠올리게 했다.
5
버들의 남편인 '태완'은 독립을 위해 피끓는 인물이며, 가족적이기는 하나 무뚝뚝하고, 신념을 위해 잠시 가족을 떠나기도 하는 인물이다.
버들의 입장에서는 그가 미울 수도 있겠으나, 나의 입장에서는 닮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의 결정이 쉽지 않았을 것임을 감히 상상해본다.
"그거이 나 살 만해질 때꺼정 조국 독립을 미루자는 말하고 뭐이 다르간. 정호 크기 전에 독립을 이뤄야 하지 않갔어? 당신이 에와에서 밥만 먹게 해 준다고 남편 노릇 다하는 거이 아니라고 말했던 일 기억난? 내레 그때 크게 각성했어. 아바지 노릇도 마찬가지야. 당신 말대로 고저 밥 굷기지 않는 아바지가 아니라 독립된 조국을 물려주는 아바지가 되고 싶구만."(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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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인 버들이 흔히들 하는 정치노선을 타지 않으면서 정치단의 싸움을 조금은 제3자의 입장이나 냉소적으로 보는 시선이 있다.
이 소설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주내용은 아니라는 거겠지만, 갈등요소로만 활용되는 것 같아서 조금 아쉬운 면도 있다.
사람들 간에 가장 호감도가 떨어지는 것 중에 하나가 정치관이 다른 거라고 하던데, 이를 포용할 수 있는 우정이 홍주와 버들이었다.
특히 소설 중 홍주의 행보가 특이하고도 당돌했는데, 조선의 신여성이 아닐 수 없다. ㅎㅎ 그런 캐릭터가 있어서 2세대까지 이어져서도 더욱 즐겁게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7
하와이 한인들 간의 두터운 관계에서 아이들을 다함께 키우는 느낌을 받았다.
'나의 엄마들'이라는 표현을 포함하여 세 명의 엄마를 가진 2세대 주인공인 '펄'을 보면 이런 마을 단위, 두 가족 이상의 이웃 단위로부터 키워진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옛날에는 이런 육아가 흔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나만 해도 어릴적 옆집, 윗집, 아랫집할 것 없이 언제든지 내가 원하면 들어가서 엄마가 오길 기다릴 수 있었고, 나도 이웃의 아기를 봐주기도 했다.
지금은 잃어버린 문화가 되어가고 있지만, 이런 이웃관계가 그리워졌다.
8
"저 아들이 꼭 우리 같다. 우리 인생도 파도타기 아이가."
아이들과 송화를 좇고 있던 버들은 홍주가 하는 말을 단박에 이해했다. 홍주 말대로 자신의 인생에도 파도 같은 삶의 고비가 수없이 밀어닥쳤다. 아버지와 오빠의 죽임, 그 뒤의 삶, 사진 신부로 온 하와이의 생활....... 어느 한 가지도 쉬운 게 없었다. 홍주와 송화가 넘긴 파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젊은이들 뒤로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파도를 즐길 준비가 돼 있었다. 바다가 있는 한 없어지지 않을 파도처럼, 살아 있는 한 인생의 파도 역시 끊임없이 밀어닥칠 것이다.(p.334)
하와이 오아후 여행을 하는 사람이면 꼭 한 번은 방문할 선셋비치, 노을이 질 때 가야하는 그 해안가는 남쪽의 와이키키와는 다른 거친 파도가 인상깊은 곳이다.
개인적으로 다치지는 않을까 걱정되는 높은 파도를 자유자재로 즐기는 서퍼들과 노을을 맞으며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이 가득한 곳이었는데 소설에서도 선셋비치가 언급되어 반가웠다.
코로나19 이후로 해외여행은 꿈도 못꾸는 이런 시대가 올 줄은 그 때는 몰랐는데, 내가 이 책을 읽고 싶은 이유 중에 하나였던 이런 다양한 하와이 풍경 묘사를 보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관광지의 하와이보다는 그 시대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 가까운 모습을 더 많이 묘사하는 책이라 하와이를 사랑하는 예비독자라면 참고하시길.
하와이 선셋비치의 거친 파도를 바라보며 이 세명의 세대는 저물어가고, 2세대인 펄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버들과 태완 사이에는 다섯 명의 아이가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인 펄을 성격은 홍주를 닮은 듯 당돌하고, 진취적이며, 송화를 닮은 듯 춤에 소질이 있는 듯하다. 이민자 1세대와 2세대가 겪을 만한 갈등을 담아내고 있다. 아빠인 태완과 비슷한 성향을 가진 듯한 첫째 정호(데이비드)의 입대를 두고 가족 내에 큰 갈등을 겪으며 소설은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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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고 나서야 표지의 주황빛 노을과 야자수 아래 한복을 입고 있는 세 사람이 궁금해졌다. 추측컨대 펄과 버들, 홍주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10
솔직히 '어떻게'라는 질문에 답을 할 수는 없지만,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져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넷플릭스?)
묘한 시대와 묘한 장소, 하와이라는 이국적인 장소에 한국적이기만한 사람들간의 정.
나는 하얀 모래알의 해안을 보고 싶었지만 보이는 거라고는 사탕수수와 빨래감뿐인 그런 삶.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살짝 뜬 무지개와 맑은 하늘, 좁디 좁은 방 안에 아내와 아이를 두고 독립을 위해 떠난다고 이야기하는 아버지.
그런 몇 가지 대비가 머릿속에 그려저서 그 시대를 더욱 안타깝고 아름답게 그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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